어린 시절 나의 이야기 -홍종흡-
이맘때쯤 어릴 적 내 이야기 들려줄 게
5학년인 내가 바쁜들 얼마나 바쁠까마는
내 발 만한 송판에 굵은 철사로 엮어
스케이트처럼 두 발 밑에 고정시키고
꽁꽁 얼은 논 어름판 위를 싱싱 달렸었고
목검을 만들어 동산에 올라 함성 지르며
아이들과 최영장군 계백장군놀이도 하고
닭장에 물과 먹이 주고 계란도 꺼내오고
청솔가지 한 짐 져 날라 군불도 때면서
감자 구워 누나와 동생이랑 먹기도 했어
한 달 전에 기르던 토끼가 집을 뛰쳐나가
찾지 못해 포기했는데 갈 곳이 없었는지
마루 밑으로 깊게 들어가 굴 파고 살다가
봄날에 새끼를 낳아 길러 밖으로 나오니
그 반가움ㅡ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지
석산네가 빌려준 벌판 모래밭 오백여 평
열예닐곱 살 된 형들과 참외를 심었는데
잘 익어서 내다 팔려고 지게에 가득 지고
퇴계원 버스종점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
손님 한 사람이 잘 익었으면 사겠다면서
하나 깎아먹어 보곤 덜 익었다며 한 개를
더 깎아먹고, 또 덜 익었다며 또 까먹고
수없이 열 여나믄 개를 다 깎아먹고 나서
좀 덜 익어 안 사겠다면서 그냥 가버리니
형들은 말도 못 하고 저녁거리도 못 샀어
옥수수, 감자로 끼니를 때우며 지냈는데
어쩌나~ 고무신이 구멍 나 흙이 들어오니
산마루 넘어 기와 굽는 마을 가마터에 가
진종일 기와 날라주고 땔감으로 들여온
신발더미에서 고무신 하나 골라 신었지
모두가 같은 처지라서 부끄러움도 없이
살아가는 게 다 이런 거구나~ 그랬었어
그래도 공부는 잘해서 우등상은 꼭 탔지
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간 어린 시절을
풍요로운 요즘세상ㅡ 누가 믿어나 줄까~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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